언론보도
[한겨레]"이제까지 없었던 상상이 가능한 마을배움터로 오세요" 2020.06.03

“이제까지 없었던 상상이 가능한 마을배움터로 오세요”

서울시 1호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청년들에게 실패할 권리증 수여 마음껏 도전할 기회 제공 주부활동가를 위한 성찰 여행도
서울시-시민단체, 공동으로 기획 수요자 맞춘 다양한 공간 만들어 종전 관청 주도 관행에서 벗어나


지난 8월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무늬만 강당’에서 10만원 프로젝트에 뽑힌 학생들이 실패할 권리증을 받은 뒤 활짝 웃고 있다.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제공
<지난 8월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무늬만 강당’에서 10만원 프로젝트에 뽑힌 학생들이 실패할 권리증을 받은 뒤 활짝 웃고 있다.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제공>

진희(고3)는 어떻게 하면 길고양이를 우리의 친구, 가족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길고양이들이 배가 고파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고, 자동차에 치일 뻔한 아슬아슬한 상황을 많이 보았다. 또한 점점 늘어나는 길고양이 학대와 공장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집 근처에서 길고양이 5~6마리를 집으로 데려와 씻겨주고 밥을 챙겨주는 등 가족처럼 보살펴주고 있다. 그는 길에서 만난 고양이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기도 한다. 그는 건강이 악화하는 길고양이들을 살리기 위해 수의사들을 찾아다니면서 방법을 찾아내려 하고 있다.

 

진희는 지난 8월 이런 생각과 활동을 바탕으로 서울시 ‘동북권역 마을배움터’에서 벌이고 있는 ‘10만원 프로젝트’에 응모해 선정됐다. 지난 21일 배움터 개관식 날에는 그동안 길고양이를 소재로 찍은 사진과 일러스트로 직접 만든 엽서 300장을 판매했는데, 100장 넘게 팔릴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진희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따로 후원금을 내기도 했고, 길고양이들의 겨울나기를 위한 행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한 사람도 있었다.“길고양이는 길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입니다. 길고양이를 지켜봐 주세요.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

 

 ■ 우이동 북한산 입구에 둥지


서울지하철 우이신설선 북한산우이역에서 도선사 쪽으로 북한산 오르는 길을 따라 200m쯤 올라가면 왼쪽의 작은 골목에 새로 단장한 건물이 눈에 띈다. 강북구·도봉구 등을 활동 영역으로 하는 동북권역 마을배움터다. 마을배움터는 서울시가 공을 들이고 있는 마을공동체 사업의 하나인데, 기획 단계부터 시민단체가 직접 참여한 대표적인 사례다. 대부분의 정부나 지자체 위탁 사업이 장소를 마련한 뒤 운영할 단체를 선정하는 게 통상적인 절차였기 때문이다.

 

동북권역 마을배움터는 공개경쟁입찰을 거쳐 품청소년문화공동체(대표 심한기)가 위탁 단체로 뽑혔다. 북한산에서 가깝고 두 개의 건물이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터라 방과 마당을 두루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주변의 주택들 사이에 있으니 그야말로 마을 속의 배움터다. 서울시가 지난해 초 매입해 공사에 들어간 뒤 건물 리모델링 작업은 품의 의도가 거의 다 반영됐다.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전경.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제공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전경.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제공>

강명숙 마을배움터 사무국장은 “애초부터 큰 공간을 원하지 않았다. 건물이 크면 관리하는 데 어려워 자칫 목적을 잊게 된다. 다만 청소년들의 다양한 활동에 맞게 공간을 여러 개로 나눠 쓸모를 찾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그간의 과정을 설명했다.

 

연면적 100평, 7개 공간의 배움터 건물이 모습을 갖추는 데는 1년 반이 걸렸다. 지난 6월 말 배움터 식구들이 입주하면서 정상적인 운영이 시작됐고, 지난 21일에는 청소년과 주민, 서울시장 등이 참가한 가운데 공식 개관식 행사를 열었다. 마을배움터는 주로 10대 청소년들이 대상이다. 원할 때 언제든지 올 수 있도록 항상 문을 열어두고 있다.

 

마을배움터에서 가장 독특한 것이라면 ‘10만원 프로젝트’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에 나온 진희 학생처럼, 청소년들에게 10만원을 주고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것이다. 제안한 프로젝트가 뽑히면 배움터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실패할 권리증’을 준다. 보통의 프로젝트는 성공을 조건으로 한다. 너무 성공에 집착하다 보면 실험정신을 잃게 되기 마련이다. 배움터는 청소년들의 도전정신을 북돋우려는 새로운 실험이다. 배움터의 활동가 한 명과 청소년이 짝이 돼서 배우면서 실험하고, 실험하면서 다시 배우는 과정을 동행한다.

 

식구로서 정서적 일체감 느껴

 

지난 8월에 10만원 프로젝트 공모를 해서 열 팀을 선정했다. 이 중에 지우(중3) 학생은 ‘청소년 자해’를 주제로 정했다. 사회에서 청소년 자해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갑기 그지없다. 그런 친구들을 만나 가슴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듣고 어른들이 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하자는 의도다. 내용을 잘 정리해 기회가 되면 책으로도 낼 생각이다.

 

배움터에서 마련한 프로그램 중에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10대 셰프 학교’다. 텔레비전에서 먹방이나 요리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6명 모집에 36명이 올 정도였다. 여기 모인 10대들은 정형화된 요리가 아니라 자신의 상상이 담긴 요리를 만든다. 2주에 한 번씩 청년 요리사를 강사로 초청해 그의 철학과 경험을 요리에 버무려 담는다. 감자나 당근 등 재료를 하나 정해주고 이야기가 있는 요리를 만들 기회를 준다.

 

10대의 주방에서 감자를 주제로 개인 요리를 하는 10대 셰프들.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제공
< 10대의 주방에서 감자를 주제로 개인 요리를 하는 10대 셰프들.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제공 >

셰프 학교는 ‘10대의 부엌’에서 진행되는데, 이곳은 배움터의 철학을 담은 곳이다. 이곳의 활동가들은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나눈다. 식구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정서적인 유대감을 쌓고, 편안한 관계를 만들어 신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품에서 28년간 밥을 해 먹던 전통이 이곳으로 이어진 것이다. 사다 먹으면 시간도 적게 걸리고 편리하다. 이곳에서 한 끼를 마련하려면 두세 시간이 걸리는 게 다반사다. 시장을 보러 가는 일부터 시작해서 만들고 먹고 치우는 일이 꽤 손이 가기 때문이다.

 

‘구해줘! 고3’이란 프로그램도 있다. 학부모들이 알면 좀 화가 날 일이겠다. 고3이란 프레임은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입시 준비를 위한 공부일 터인데, 여기서는 안 하는 게 목적이다. 선택을 강요받는 삶을 깨보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하는 것이다. 배움터로 와서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 가슴속에 품은, 부모나 교사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치킨·피자 등을 시켜 먹으면서 서너 시간씩 수다를 떨거나 쇼핑하거나 뭐 그런 것들이다. 10대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데 목적이 있다. 누구나 올 수 있도록 했는데 6명밖에 오지 않았다. 사회가 그만큼 고3을 굴레에 가뒀고, 그 굴레를 깨기가 어렵다는 방증이다.

 

지난 21일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개관식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방’에서 10대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제공
<지난 21일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개관식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방’에서 10대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제공>

남의 삶을 고민하다가 자기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주부활동가를 위한 여행학교 숨도 특별하다. 낮에는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지친 하루를 보냈는데 집으로 돌아가면 주부라는 무게에 허리가 휜다. 이러한 활동가들에게 생활에서 벗어나 삶을 성찰하도록 부채질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강사의 강의를 들으며 자신을 추스를 여행을 기획하는 것이다. 여행 경험을 다른 활동가와 공유하고 책으로도 출판하는 것이다. 한 활동가는 가족 여행은 많이 했지만 혼자 여행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 가는 여행을 준비해서 떠났다. 지난여름 2주간 러시아 횡단 열차를 타고 혼자 한 여행은 그에게 새로운 활기를 선물했다. 싸우고 사이가 멀어진 친구와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이 프로그램은 고민하고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도와주는데, 여행비용을 지원해주지 않는 게 좀 아쉽다.

 

지난 21일 열린 개관식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등 하객들과 배움터 학생·운영진 등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제공
<지난 21일 열린 개관식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등 하객들과 배움터 학생·운영진 등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제공>

 

청년들 욕구 조사해 맛보기 실험

 

이 밖에 10대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발견한 욕구를 실험하는 ‘맛보기 학교’다. 실험을 거쳐서 검증되면 프로그램 자격을 얻게 된다. 그중 하나가 자신만의 커피를 만들고 시음하고 평가하는 ‘커피 클래스’다. 누구나 와서 만들어볼 수 있다. 이곳은 카페가 아니라 ‘낭만 공유지’란 이름을 붙였다.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공간의 주인이 돼서 운영할 수 있다. 커피도 음료는 돈을 받고 팔지 않고, 이곳에서만 쓸 수 있는 낭만 화폐를 받는다. 배움터의 활동에 참여하면 정해진 낭만을 받을 수 있다.

 

강명숙 사무국장은 “배움터는 청소년들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신나는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이제 첫발을 뗐을 뿐”이라며 “앞으로 이런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김학준 선임기자 kimh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