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짓공유
청소년마을배움
[2019년 구해줘! 고3!] 프로그램이 아닌 존재의 환대부터 2020.08.13

 

저는 원래 꿈이 있었는데요. (...중략...) 지금은 없어요.

내가 다른 무언가를 해볼 수 있겠다는 고민이 시작되면 끝이 없더라고요. 

냥 지금은 다른 생각 말고 공부에 집중하려구요.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게 하는 게 대학교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해서 

학은 나중을 위해서라도 저한테는 꼭 가야되는 곳인 것 같아요.

2019 마을배움터 고3 FGI 중에서

 

 고3에게는 꼬리표가 붙는다.  

'고3이니까 체육대회에서 제외, 고3이니까 학교축제에서 제외!

고3이니까 쫌만 참으면 되, 고3이니까 건들면 안돼!!'

고3에게는 피해가기 어려운 희망고문이 더해진다.

'좋은 대학만 가면 행복해질거야, 좋은 곳에 취업만 하면 돼,

자격증 3개만 있으면 잘 될 거야. 1등급만 더 올리면 더 잘 될 거야...'

달라붙는 꼬리표와 뿌연 희망이 19살의 ‘존재’를 ‘고3’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린다. 오늘의 삶을 미래를 위한 삶으로 바꿔버리기도 한다. 고3이 되어버리면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들면 안돼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을 한다. 꽃다운 19살에 오로지 책상 앞에만 앉아있는걸 눈 뜨고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고3이 아닌 19살 000의 존재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구해줘! 고3!> 이라는 이름 아래 고3을 대놓고 건드려보기로 했다.


구해줘 고3 홍보물 부분

#. 혁신고는 지금 카오스..

이렇게 저렇게 자기 삶을 상상하고 고민하던 아이들도 고3이라는 꼬리표를 달아버리는 순간 삶에 대한 고민이 쓸모없는 짓처럼 다가와 멈춰버린다. 자기 고민을 이어가는 고3은 소수 중의 소수이다. 그 아이들이 자기 발로 배움터에 찾아오는 건 쉽지 않을 것이 예상되었다. 

 

예상했듯 SNS, 동네 활동가, 알고 지내는 십대들, ‘18년도 설문조사에 연락처를 남긴 십대들 등 해볼 수 있는 기본 홍보로는 고3이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이 자리에 해당되는 사람인지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마음은 기울지만 선뜻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듯했다. 

 

결국 학교 안으로 들어가 고3 교사들을 만났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아이들의 상황이라면 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 아이들과 부딪히고 있는 고3 담임교사가 직접 추천해주는 방법이 가장 좋겠다고 판단되었다. 혁신학교로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고등학교를 찾아갔다.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분주해보였다.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동물보호 의미를 담은 열쇠고리나 수제비누 등을 만들어 작은 장터를 열고 있었고, 학교에 곳곳에 남는 벽엔 어마어마한 양의 홍보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학교를 들어가자마자 직감적으로 교육활동이라는 이름아래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있음을 느꼈다.

혁신부장과 고3 학년부장 선생님을 만났다.  

 

“그래서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인사도 나누기 전, 처음으로 다가온 말이었다. 지속적으로 건네 오는 말엔 ‘아이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무기력하다’, ‘이미 해볼 수 있는 건 꽉차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마디는 배움터에서 하려는 구해줘 고3은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차 별 커리큘럼이 정확하게 짜여있어야 하고, 활동해볼 수 있거나 배울 수 있는 ‘컨텐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구에서 인증 받은 ‘마을교사’여야만 학교 안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넘쳐나는 콘텐츠와 프로그램에 익숙해진 교사와 아이들을 짧은 시간이지만 강렬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프로그램이 아니면 배움이 아니고, 마을교사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하면 신뢰할 수 없는 교사인 셈이다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배움은 컨텐츠를 통한 기술의 배움이 아니라 진정한 관계를 경험하고 그로부터 피어나는 배움의 욕구라고 생각된다. 이미 학교 안에서 넘쳐나는 프로그램이나 컨텐츠로 배움의 욕구나 아름다운 관계의 경험을 만들기엔 어려워 보인다.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이고, 진정한 스승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물음이 사라졌다. 

 

#. 고3에게 필요한 배움은 무엇일까.

19살 아이들을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고민은 ‘진정한 자립은 무엇일까?’였다. 살아가며 생겨나는 모든 것들을 홀로 감당하고 해결하는 것이 자립일까? 이제 성인이 된다는 19살에게는 너무나도 폭력적인 형태로 성인으로서의 책임감이 던져진다. 어떻게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실험해볼 기회를 주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이들에게 자립은 ‘그럴 거면 나가서 자립해(혼자 살아)보던지’라는 말들로 모든 것들을 해결하고 버티며 일어서야 한다는 암묵적 압박과 의미를 전한다. 자립은 모든 걸 혼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중심을 잡아가는 것,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과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을 함께 실험하고 고민하는 동료와 어른들과의 접촉을 통해 충분히 도전해보고 충분히 실패해보는 시간과 기회가 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연결해줄 수 있는 것은 많고, 공부해볼 수 있는 것 또한 많다. 하지만 어떠한 연결과 지원 즉 어떤 ‘콘텐츠’이냐 이전에 십대가 ‘나’라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환영받고 받아지는 경험, 그 안에서의 서로의 다름과 나의 존재가 인정되는 것이 큰 힘이 될 것이다. 어떠한 조건 아래 아이들은 환대 받거나 그 조건의 기준에 닿지 못하면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환대와 반겨짐의 경험은 무언가를 시도해볼 용기로 이어진다. 믿고 기댈 수 있는 공간과 사람과의 관계는 발을 디디고 일어설 수 있는 디딤돌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살고 싶은 삶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가며 살아가는 삶이 자립의 과정일 것이며 그 과정 안에서의 흔들림, 막연함, 두려움을 함께 겪어가 보려는 어른이 마을에 함께 사는 삶의 교사일 것이다. 

  

#.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19살

단짝 친구들이 손잡고 찾아왔다. 그냥 한번 와봤다, 친구 따라 와봤다, 그냥 궁금했다, 다른 친구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등.. 단순한 이유로 찾아온 발걸음이었다. 


그 단순함의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 무언가의 다름과 변화를 기대하거나 상상했기에 찾아올 수 있는 발걸음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발걸음의 그 아이 존재의 힘일 것이다. 

 

우리는 그저 어떠한 계획도 흐름도 없이 수다를 나눴다. 프로그램도 아니고, 컨텐츠도 없다. 농담도 나누고 장난도 치고, 치킨도 시켜먹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교감이 일어났다. 아마 동등한 느낌의 믿을만한 어른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십대를 마냥 어린아이로 혹은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고, 뭔지 모를 정성스러운 환대가 아이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학교 이야기, 평소 일상에 대한 이야기, 고민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찔끔씩 나누었다. 친한 친구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하려니 서로 낯간지러운지 이야기가 빙빙 돌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많은 것들이 나눠지고 있었다.  

 

이 친구들은 배움터 이삿날 흔쾌히 달려와 일손을 보탰다. 품과 마을배움터의 일이라면 달려오는 형 누나들과 인사를 나눴다. 몸은 바삐 움직이면서 어른 같은 형누나들 마저 각자의 불안을 안고 살며, 그럼에도 저마다의 속도와 방식으로 살아내려 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갔다. 그리고 여전히 말로 설명은 안 되는 따듯한 관계의 문화를 알아갔다. 그렇게 조금씩 다른 것들을 해볼 수 있는 마음상태로 말랑말랑해지고 있다. 앞으로 이들과 무엇을 해볼지, 어떻게 빼앗긴 삶을 나의 삶으로 되돌릴지 이리저리 상상하고 움직일 듯하다.